영화과 극작과 입시 작법서 추천: 시학과 로버트 맥키

작법서는 글을 잘 쓰게 만들어주는 문제집이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구조를 읽어내는 도구입니다. 이 글에서는 모든 스토리 이론의 원전인 아리스토텔레스 시학과 그것을 현대적으로 집대성한 로버트 맥키의 저작을 중심으로, 영화과와 극작과 입시생이 왜 이 두 권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시학의 개연성과 필연성 개념이 한예종 스토리텔링 평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좋은 사건이 왜 다음 행동을 품고 있어야 하는지를 실제 작품 사례로 정리하고, 두꺼운 이론서를 부담 없이 활용하는 독서법까지 함께 다룹니다.
작법서는 수학의 정석이 아닙니다
작법서 추천을 묻는 학생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질문의 전제가 대개 이렇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글을 잘 쓰게 되느냐는 거죠.
작법서와 글을 잘 쓰는 일은 조금 다른 영역입니다. 수학의 정석처럼 문제 풀이법이 담긴 교재로 접근하면 실망하기 쉽습니다.
작법서가 실제로 해주는 일은 다른 데 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를 분석하는 눈을 만들어줍니다. 영상 분석이라고 하면 촬영이나 편집 같은 기술적 요소를 떠올리기 쉬운데, 정작 중요한 건 이 장면이 앞뒤 장면과 어떤 관계로 연결되는지를 스토리 차원에서 읽어내는 능력입니다
좋은 작법서는 그 자체가 교양입니다. 수많은 작품이 사례로 인용되기 때문에, 책 한 권을 읽으면 이야기의 목록이 함께 늘어납니다
입시에서 인용할 근거가 생깁니다. 자기 글이나 면접 답변에 이론적 뿌리가 생기면 말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작법서는 읽어야 합니다. 다만 순서가 있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이 되는 두 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책: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작법서에는 원전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입니다. 2600년 전 책이죠.
서울예술대학교 극작과에서 신입생에게 시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게 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10년쯤 전에 학생들이 힘들어 죽겠다고 하소연하던 기억이 나는데요. 방식에는 전부 동의하기 어렵지만 취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왜 그런지는 문장을 직접 보면 됩니다. 천병희 선생이 고대 그리스어 원전을 의역 없이 직역한 판본에서 두 대목만 옮겨보겠습니다.
플롯은 스토리 내에서 행해진 것, 즉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 한편 성격은 행동자를 일정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바를 의미하며, 사상은 행동자들이 무엇을 증명하거나 또는 보편적 진리를 말할 때 그들의 언사에 나타나는 바를 의미한다.
행동의 모방이 곧 플롯이라는 정의가 이미 여기서 나옵니다. 2600년 전에요.
성격에 있어서도 사건의 구성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필연적인 것 혹은 개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이 어떠한 것을 말하거나 행동할 때 그것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하며, 두 사건이 이어서 일어날 때는 후자는 전자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라야 한다.
이 문장을 읽고 놀란 학생이라면 감이 좋은 겁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교수님들이 스토리텔링 평가에서 반복해서 요구하는 개연성과 필연성이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앞 사건이 뒤 사건의 원인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 말이죠.
입시에서 고전은 언제나 이깁니다
논문을 쓸 때 가장 중요한 게 저자입니다. 원전의 말이 가장 앞섭니다.
면접이나 논술에서 자기 이해를 설명할 때 시학의 개념을 근거로 삼으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남이 정리해둔 요약을 인용하는 것과 원전을 이해하고 말하는 것은 전달되는 무게가 다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그리스 비극은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를 원전 번역으로 읽으면 2600년 전 이야기가 놀랄 만큼 현대적입니다.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고전과 현대성을 연결지어 생각하기 시작하면 소재가 무궁무진하게 나옵니다.
두 번째 책: 로버트 맥키
시학을 현대적으로 집대성한 사람이 로버트 맥키입니다. 스토리텔링 분야의 구루라고 불리는 인물이죠.
국내에서 오래 읽힌 책이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였고, 지금은 절판된 뒤 스토리라는 제목으로 다시 편집되어 나와 있습니다. 같은 책입니다. 두께에 비해 가격 부담이 크지 않은 편이니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한 권 갖고 계셔도 좋습니다. 정가는 시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구매 전 확인하세요.
저는 이 책을 인생 책 세 권 안에 넣습니다. 이론서라기보다 사례집에 가깝습니다. 언급된 영화를 하나씩 찾아보면서 읽으면 이야기 구조에 살이 붙습니다.
좋은 사건은 이후의 행동을 내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얻은 문장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맥키를 읽기 전에는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게 늘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자꾸 사건을 만들어 넣었죠. 지갑을 잃어버리게 하고, 강도를 만나게 하고, 고양이가 등장하게 하고. 뭔가 계속 벌어져야 진행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문장을 만납니다. 좋은 사건은 그 이후의 모든 행동을 내포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이렇습니다.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 건 사건을 잘못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을 더 붙일 게 아니라 사건 하나를 제대로 세워야 한다는 뜻이죠.
올드보이를 떠올려 보면 바로 이해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십몇 년간 갇혀 있다가 풀려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다음에 무엇을 할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나요. 누가 왜 가뒀는지 알아내야 하고, 알아낸 다음에는 복수해야 합니다. 사건 하나 안에 이후의 이야기가 전부 들어 있습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고 나면 자기 글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건이 약하면 뒤에 무엇을 붙여도 이야기가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다이얼로그와 캐릭터까지 세 권
맥키의 저작은 후속편이 이어져 있습니다. 스토리 이후에 다이얼로그와 캐릭터가 나왔습니다. 세 권으로 정리된 셈이죠. 우선순위는 스토리가 먼저입니다.
두꺼운 책 읽는 법: 한 챕터만 읽어도 읽은 겁니다
작법서 이야기를 하면 두께에서 포기하는 학생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두꺼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으려고 욕심낼 필요가 없습니다. 챕터 하나만 읽고 덮어둬도 읽은 겁니다. 나중에 다시 펴서 다른 챕터를 읽으면 됩니다.
교수님들 연구실 책장에 두꺼운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죠. 그 책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시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필요한 대목을 골라 읽고 그것을 자기 언어로 활용하십니다.
책은 읽는 것보다 써먹는 게 중요합니다. 짧게 일부만 읽더라도 그 내용을 자기 작업에 활용할 수 있다면 그 책을 충분히 누린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면, 맥키의 스토리는 절대 재미없는 책이 아닙니다. 두꺼워서 지루할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미루는 학생이 많은데, 장담하는데 재미있습니다.
읽는 순서 정리
순서 | 책 | 무엇을 얻는가 | 입시에서의 쓸모 |
|---|---|---|---|
1 |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 플롯, 개연성, 필연성의 원전 정의 | 면접과 논술에서 근거로 인용 |
2 | 로버트 맥키 스토리 | 사건 설계, 장면 전환, 구조 분석 | 자기 글의 사건을 점검하는 기준 |
3 | 맥키 다이얼로그, 캐릭터 | 대사와 인물 구축 | 시나리오 완성도 보강 |
시학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후의 거의 모든 스토리 이론이 여기서 갈라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뿌리를 알고 나면 다른 작법서를 읽을 때 이해 속도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레포케 수업에서도 학생이 쓴 글을 볼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사건과 개연성입니다. 이 사건이 다음 행동을 품고 있는지, 앞 사건과 뒤 사건이 필연적으로 이어지는지를 봅니다. 결국 시학과 맥키가 말한 것과 같은 기준이죠. 2025년 한예종 영화과 8명 합격도 화려한 소재가 아니라 이 기본기에서 나왔습니다.
한예종 스토리텔링이 실제로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지는 레포케 합격 후기에서 사례로 확인하실 수 있고, 전형별 준비 순서는 레포케 입시 가이드를 참고하세요.
핵심 정리
작법서는 글쓰기 정석 교재가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의 구조를 읽는 도구입니다
첫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입니다. 이후 대부분의 스토리 이론이 여기서 파생됐습니다
시학의 개연성과 필연성 개념은 한예종 스토리텔링 평가 기준과 직접 연결됩니다
두 번째 책은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입니다. 사례가 풍부해 영화를 함께 보며 읽으면 효과가 큽니다
좋은 사건은 이후의 행동을 내포합니다. 이야기가 안 굴러가면 사건을 더 붙일 게 아니라 사건 하나를 다시 세우세요
두꺼운 책은 챕터 하나만 읽어도 읽은 겁니다. 완독보다 활용이 중요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영화과 입시를 처음 준비하는데 작법서를 몇 권이나 읽어야 하나요?
A. 권수보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과 로버트 맥키의 스토리 두 권이면 출발점으로 충분합니다. 여러 권을 얕게 읽는 것보다 이 두 권을 곱씹으면서 실제 영화에 적용해보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Q. 시학은 번역본이 여러 종류인데 어떤 걸 골라야 하나요?
A. 고대 그리스어 원전을 직역한 판본을 권합니다. 의역이 많은 판본은 읽기는 편하지만 원문의 개념어가 흐려집니다. 면접이나 논술에서 인용할 생각이라면 직역본이 유리합니다.
Q. 작법서를 읽으면 글이 정형화되지 않을까요?
A. 이론을 공식으로 받아들이면 그렇게 됩니다. 작법서는 자기 글을 점검하는 기준이자 남의 작품을 분석하는 렌즈로 쓰는 게 맞습니다. 특히 한예종처럼 정형화를 경계하는 학교에서는 이론을 알되 의도적으로 벗어날 줄 아는 편이 유리합니다.
Q. 책이 너무 두꺼워서 완독할 자신이 없습니다.
A. 완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 챕터를 읽고 그 내용으로 영화 한 편을 분석해보세요. 그렇게 활용한 챕터 하나가 대충 훑은 열 챕터보다 남습니다.
